누룩과의 여정(feat. 장건강)

우리나라 누룩, 어디까지 왔나? 흑백요리사부터 파인다이닝까지 K-발효의 현재

nowisnow 2026. 4. 10. 23:33

누룩이 된장찌개 속에서만 조용히 존재하던 시대가 끝났습니다. 2024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누룩과 발효는 전통의 영역을 벗어나 파인다이닝, 유튜브 콘텐츠, SNS 트렌드, 홈쿠킹 문화까지 빠르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한국 누룩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구체적인 흐름을 정리해드릴게요.

 

흑백요리사가 불붙인 발효·숙성 관심

2024년 9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1은 한국 요리 씬에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캐치테이블 데이터에 따르면 방송 직후 출연 셰프들의 식당 예약은 전주 대비 평균 148% 증가했고, 일부 식당은 최대 4,937%까지 예약이 폭증했어요. 이 프로그램이 단순히 요리 서바이벌을 넘어서 한국인들의 '파인다이닝 관심'과 '식재료에 대한 호기심'을 폭발적으로 키워놓은 거죠.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들 중 발효와 숙성을 핵심 기술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미슐랭 1스타 한식당 윤서울의 김도윤 셰프는 드라이에이징(건식 숙성) 기법을 생선에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W Korea와의 인터뷰에서 "기름에 달군 팬에 반건조 농어를 올리면 마치 껍질이 엠보싱처럼 변하면서 독특한 텍스처가 만들어진다. 이게 드라이에이징의 마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발효와 숙성이라는 개념이 대중적 관심을 받는 데 흑백요리사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겁니다.

2025년 말 공개된 시즌2에서도 발효를 테마로 한 한식 셰프들이 큰 주목을 받았으며, '전통주를 빚고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식문화의 다양성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출연 이유를 밝힌 셰프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파인다이닝 씬 — 발효가 시그니처가 되다

2025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부산 선정 레스토랑들을 보면 발효와 숙성이 핵심 키워드로 등장하는 곳이 크게 늘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가 소개한 레스토랑 중에는 '발효와 숙성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으로, 다양한 식자재를 발효 및 숙성하여 사용하며 심도 있게 코스 요리로 풀어낸다. 단맛·쓴맛·매운맛·감칠맛 외에 발효와 숙성, 셰프의 손맛까지 총 7가지 맛을 표방하는 레스토랑'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흑백요리사 심사위원이었던 안성재 셰프의 '모수'는 한국 유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한국 전통 발효의 정수를 현대 파인다이닝 언어로 번역하는 곳으로 평가받습니다. 2023~2025년 미슐랭 1스타를 3년 연속 유지한 김도윤 셰프의 '윤서울'도 숙성과 발효를 중심에 둔 한식 파인다이닝으로 자리 잡았어요.

 

코지로 고기 재기 — 가정까지 퍼진 트렌드

파인다이닝 씬에서 시작된 코지 활용이 가정요리로 내려오는 흐름도 뚜렷합니다. 코지(또는 누룩소금)에 고기를 재우면 프로테아제 효소가 근섬유를 분해해 놀랍도록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단순한 연육 효과를 넘어 고기 자체의 감칠맛 성분(아미노산, 핵산)을 끌어내는 '자연 숙성 효과'입니다.

이 원리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코지 마리네이드(麹漬け)'로 불리며 생선, 닭고기, 돼지고기 등에 활용돼왔습니다. 한국에서도 SNS와 유튜브를 통해 '누룩소금 삼겹살', '코지 치킨', '누룩 소갈비' 등의 레시피가 빠르게 퍼지고 있어요. 배우 양희경도 유튜브 채널 '양희경의 딴집밥'에서 누룩소금을 직접 만들어 요리에 활용하는 영상을 소개하며 일반인들의 누룩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방송에서의 노출 — 누룩 마사지부터 건강 프로그램까지

음식 너머로도 누룩의 노출이 늘고 있습니다. 누룩을 물에 개어 얼굴에 바르고 마사지하는 '누룩 팩'은 일본에서 먼저 유행했지만, 한국 건강·미용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됐어요. 누룩의 코지산(Kojic acid)이 멜라닌 생성을 억제하고 효소가 각질을 분해한다는 원리가 알려지면서, 피부 관리법으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통주 르네상스 — 누룩으로 빚는 새로운 술 문화

한국 전통주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누룩으로 빚는 막걸리와 약주가 단순한 '서민의 술'을 넘어 프리미엄 시장으로 진입하고 있어요. 전통 누룩의 복잡한 균 구성이 오히려 '테루아(terroir, 지역 고유의 맛)'를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지역 누룩을 사용한 한정판 전통주들이 와인처럼 수집되고 있습니다. 일부 전통주 양조장은 일본 코지 기술을 역수입해 황국균을 정밀 관리하면서도 한국 전통의 복합균 발효 방식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누룩'을 개발하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한국 누룩의 과제 — 표준화와 세계화

현재 한국 누룩이 극복해야 할 과제도 분명합니다. 첫째는 품질 표준화입니다. 일본이 코지를 글로벌 식품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가 균주 관리와 품질 균일화였거든요. 한국 전통 누룩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일정한 품질을 보장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세계화 스토리텔링입니다. '코지'라는 일본어 표현이 글로벌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한국 누룩만의 차별화된 가치를 영어로 어떻게 전달할지가 중요한 과제예요.

하지만 흑백요리사 이후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한식에 대한 관심, 발효식품 트렌드, K-푸드 열풍이 맞물리면서 지금이 한국 누룩이 세계 무대로 나갈 가장 좋은 시기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참고: 캐치테이블 데이터, 2024 / 미슐랭 가이드 서울·부산 2025 / W Korea, 「주방에서 만난 흑백요리사의 셰프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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