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잔, 미소된장국 한 그릇, 사케 한 모금. 국적도 다르고 맛도 전혀 다른데, 이 셋을 이어주는 공통의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누룩균, 아스페르길루스예요. 오늘은 누룩균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발효물을 만들어내는지, 그 과학적 원리와 문화적 의미를 함께 파고들겠습니다.
아스페르길루스 —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곰팡이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재(Aspergillus oryzae)는 학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유용한 미생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균의 유전체(게놈)는 2005년 Nature 지에 완전 해독 결과가 발표됐는데, 놀랍게도 약 12,000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수가 다양한 효소 생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유전적 다양성이 누룩의 효소 생산 능력을 이토록 풍부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병행 복발효(Parallel Double Fermentation) — 한국·일본만의 독특한 발효 방식
막걸리와 사케가 전 세계 다른 술과 구분되는 핵심은 발효 방식에 있습니다. 맥주는 보리를 발아(몰팅)시켜 당화한 후 효모로 발효합니다(단계적 발효). 와인은 포도 자체의 당을 효모가 발효시킵니다. 하지만 막걸리와 사케는 누룩이 쌀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당화'와 효모의 '알코올 발효'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걸 병행 복발효(Parallel Double Fermentation)라고 합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알코올 농도를 높이면서도 과발효(스틸)를 방지할 수 있다는 거예요. 효모가 처리할 수 있는 당의 양이 제한적인데, 누룩이 전분을 천천히 당으로 바꿔주기 때문에 효모가 과부하 없이 지속적으로 알코올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덕분에 막걸리는 6~8%, 고급 사케는 15~20%까지 알코올 농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술마다 다른 이유 — 조건의 차이
같은 누룩균을 써도 조건에 따라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수분이 많고(60~70%) 온도가 적절하면(25~30℃) 효모가 활발해져 알코올 발효가 주도적으로 일어납니다. → 막걸리, 사케, 약주
소금을 넣으면(15~20%) 효모의 활동은 억제되고 효소만 천천히 작용합니다. → 된장, 간장, 미소
낮은 온도에서 오래 발효하면 다양한 향미 성분이 만들어집니다. → 고급 사케(긴조, 다이긴조)
한국 막걸리 vs 일본 사케 — 같은 원리, 다른 결과
두 술 모두 쌀과 누룩을 발효해 만들지만 맛이 전혀 다릅니다. 주요 차이는 누룩 종류와 발효 관리 방식입니다. 막걸리는 한국 전통 누룩(복합균)을 쓰고, 찹쌀을 포함하기도 하며, 여과를 최소화해 탁하고 유산균이 살아있는 상태로 마십니다. 반면 사케는 황국균 단독 코지를 쓰고, 여과를 철저히 하여 맑은 술을 만들며, 온도 관리를 엄격히 해 다양한 향미 스펙트럼을 구현합니다.
국내 학술지에 발표된 '원료 쌀과 누룩의 처리 및 첨가방법이 다른 전통주의 발효특성 비교' 연구에 따르면 누룩 농도가 높아질수록 알코올 함량이 증가하며, 밑술(주모)을 만들어 사용하면 잡균 오염을 방지하고 발효가 더 안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글로벌에서 코지가 뜨는 이유 — 파인다이닝의 선택
최근 뉴욕, 코펜하겐, 도쿄의 미슐랭 레스토랑들이 코지를 핵심 기법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였던 코펜하겐의 노마(Noma)는 2010년대 초부터 코지 발효를 메뉴에 적극 도입해 '코지 버터', '코지 가리비', '코지 쌀 크림' 등을 선보이며 전 세계 파인다이닝 셰프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이 흐름이 한국의 파인다이닝 씬에도 영향을 미쳐 발효를 주제로 한 레스토랑들이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참고문헌: Machida et al., "Genome Sequencing and Analysis of Aspergillus oryzae", Nature, 2005 / 박현진 외, 한국식품과학회지 / Noma Mad Food Lab 연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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